상단여백
HOME 피플&오피니언 인터뷰 포커스뉴스
평론의 시대적 역할은 여전히 유효
이 시대 평론의 정의와 역할
[웰빙코리아뉴스] 임규태 기자 =

Opinion Music Review

 이 시대 평론의 정의와 역할

미국의 한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다. 문학적 재능이 넘치는 학생들이 ‘문학비평클럽’을 결성하고 매주 각자가 쓴 작품을 공개했다. 문장력과 표현력, 수사력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이들의 작품은 대단했다. 구성원들은 서로의 작품을 해부하면서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작품의 문제점과 시빗거리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했다. 상대방 작품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철저하게 해부해 냉정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또 한 클럽, 문학토론클럽이 있었다. 이들 멤버 역시 각자의 작품을 논하는 면에서는 비평과 같지만 이들은 주로 상대방의 장점을 칭찬하고 훨씬 부드럽고 긍정적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20년이 지난 후 이 학교 교무과에서는 동문학생들의 경력을 조사하던 중 ‘문학비평클럽’과 ‘문학토론클럽’ 멤버들 사이의 문학적 성취도에 큰 차이를 발견했다. 시, 소설 등 문학적 재능이 넘치던 문학비평클럽 구성원 누구도 문학가의 길을 걷지 못한 반면, 문학토론클럽의 멤버들 대부분은 시인, 소설가, 작가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영화 ‘파가니니’의 대사 중에 역사비평가 베른트 비테의 말이 등장한다. ‘비판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갖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한다.’ 그냥 한번 듣고 마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성공으로, 때로는 파멸로 이끌 만큼 강력하다는 의미다. 우리 음악계에도 그런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비평’이라는 살포기에 실어 살인적인 독가스를 풍긴 나머지, 결국 예술가로서의 일생을 종치게 한 사례도 많았다.
과거의 이런 사례를 보건데 도대체 인간의 문학예술세계에서 비평의 참된 역할은 무엇인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또 칭찬과 격려도 과연 비평의 영역인데도, 왜 칭찬은 비평이 아니라는 오해를 할까? 어쨌든 건전한 비평은 반드시 필요하다는데 중지를 모은다. 이번 좌담회는 비평의 본질에 대해,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 썰전을 펼쳐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평론의 정의와 비평을 위한 다양한 요소들

김종섭 : 평론의 정의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평론하면 과연 무엇이 진짜 음악계의 평론의 정의를 두고 생각을 해보게 돼요. 과연 칭찬만 하는 것이 평론인지 아니면 그 사람이 연주하는 것에 대해 잘잘못을 정확히 짚고 개선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 평론인지 하는 문제죠. 송주호 선생님께서는 평론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송주호 : 일단 평론의 사전적 의미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두고 어떠한 대상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고 왜 옳고 그른지 시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론가라 하면 그 점에 대해 생각을 많이 가져야 하는 거죠. 현재 살고 있는 시대에서 옳은 것은 무엇이고 그른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그 이유에 대해선 내가 그냥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기준과 가치관이 확고하게 있어야 하는 겁니다. 평론은 그러한 것을 바탕에 두고 시작해야 비로소 가치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김종섭 발행인

김종섭 : 그렇군요. 그렇다면 김인겸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인겸 : 저 같은 경우엔 다른 장르의 예술과 우선 비교를 해보고 싶어요. 미술과 문학 같은 경우엔 텍스트만 있습니다. 미술은 회화면 회화, 조각이면 조각. 이렇게 텍스트만 존재하지요. 문학 같은 경우에도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텍스트만 존재합니다. 음악에 있어서 굉장히 다른 점은 텍스트가 작품으로서 존재를 하고 연주라는 게 별도로 존재한다는 점이죠. 연주를 거쳐야 비로소 음악이 들리게 되고 우리는 그 음악을 평론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음악 평론가가 해야 할 일은 텍스트, 즉 작품과 연주자의 해석, 두 가지를 다 고려해야 하는 겁니다. 제 생각엔 이 점이 다른 분야에서의 평론과 차별성을 보이는 부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폭넓은 전문성이 필요하죠.

특히 연주 자체는 인간이 몸을 사용해서 물리적인 진동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 매우 실증적인 태도로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음악 자체는 형이상학적이죠. 실증적이면서 음악 텍스트에 충실해야 하지만 동시에 종속되면 안 되고 철학적인 맥락도 보아야 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보단 과거의 대가들의 작품을 많이 연주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지금 한국에 이 시대에 지금 여기 있어서 시의적절한지 그리고 그 해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바로크음악 같은 경우엔 우리가 정격연주라 하는데 이때는 연주방식, 해석, 오케스트라의 악기 배치 등에 대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철학적인 문제, 사회적인 맥락도 같이 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음악 평론이라 함은 복잡하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를 많이 고려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용원 : 저는 송주호 선생님의 말씀에 조금 의문을 품고 싶습니다. 옳고 그름의 시비를 가리는 게 평론의 역할이라 하셨는데 그럼 음악에서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가요?

송주호 : 과거의 평론을 보면 어떤 평론가가 어떻게 이야기했는데 이에 대해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인가 하는 것에 대해 제가 의구심을 품는 거예요. 제가 옳고 그름이라 말을 하는 건 사전적 정의라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가 평론이라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전적 의미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 의미에서 드렸던 말씀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다양성이 가치를 갖는 이런 시대에 과연 평론이 존재할 수 있느냐에 오히려 거꾸로 생각을 해보곤 해요. 그래서 결국은 각자가 생각한 가치관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사실 당연하긴 하죠.

성용원 작곡가

성용원 : 송주호 선생님이 이 문제를 굉장히 학술적으로 풀어버리셨네요. 평론의 정의에 대한 담론은 밤을 새도 부족할 거 같네요. 이런 것보다는 현 시대에 평론가의 역할이 무엇이고 한국음악계에서의 위치는 과연 어느 정도에 있는가 하는 주제가 오늘 좌담회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봅니다. 예를 들면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이 나왔을 때 평론가들은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죠.

또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 초연되고 사라사테 조차 2악장 오케스트라의 긴 서주부를 언제 다 듣고 있느냐, 지루하다고 평했었죠. 그래서 지금은 그때의 평론들이 그르다 틀렸다.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건지 궁금합니다.

송주호 : 그 당시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아요. 18세기나 19세기 음악 문헌을 보게 되면 평론 혹은 감상문이 많이 보이는데 그러한 것이 시대에 그러한 가치관과 사고가 있었다고 하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역할이 그냥 연주 잘 한다, 곡 잘 썼네 하는 것이 아니라 곡을 잘 썼으면 왜 잘 썼다고 할 수 있는가. 연주를 잘 했으면 왜 잘 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사람이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왜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고 왜 제대로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가 예전엔 시류라 해야 하나요? 전체적인 움직임들이 있었는데 최근엔 더 세분화되고 나뉘어져 개성화되었단 말이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평론가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보는 거예요. 과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들이 필요한 거예요.

김인겸 : 과거 한슬릭 시대엔 요즘 같은 시대에 비해 어떤 기준이란 게 있었고, 권위가 있었고,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등에 있어 합의된 기준이 있었는데 반대로 포스트모던 시대로 오면서 그런 기준에 굉장히 다원성이 생기고 상대적인 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까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씀드리면 어떻게 보면 파편화된 측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복합적으로 여러 가지를 봐야 하기도 합니다.

평론, 비평, 칼럼니스트의 정의에 대해

성용원 : 직업이 세분화가 되다보니 평론가, 비평가, 칼럼니스트 등등이 있습니다. 이 직업들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김인겸 : 사실 평론가라는 건 과거 19세기적인 단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금은 칼럼니스트가 맞아요. 평론은 굳이 따지자면 과거의 기준이 하나로 합의되기 쉬울 때 이야기인데 지금은 상대성이 커지고 다양해지고 복잡해졌기 때문에 칼럼처럼 좀 더 자유로운 형식의 글이 맞다고 여깁니다.


성용원 : 칼럼이라 하면 평론가가 해야 할 여러 역할과 의무 중에서 하나로만 좁혀지지 않을까요?

김인겸 : 저는 오히려 좀 더 넓어진다 생각합니다.

김인겸 음악칼럼니스트

송주호 : 글쎄요. 무대극을 놓고 오페라와 뮤지컬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과 굉장히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합니다.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영역이긴 한데요. 저는 그 두 가지를 놓고 볼 때 아까 처음에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를 한 거예요. 딱딱하지만 그런 사전적 정의를 보지 않고서는 칼럼과 평론이 무엇이냐를 논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저는 칼럼은 개인적인 신념을 주로 많이 다룬다 생각하고 있고 평론이라 하면 상당히 정의하기 쉽지 않아요. 합의된 가치관 기준으로 하는 것이 평론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사실 그것도 정확하진 않죠.

김종섭 : 평론의 정의에 대한 제 질문의 본의는 건전한 비평에 대한 탐구였어요. 이 질문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평론이 무엇인가를 먼저 화두로 한 거죠. 저는 순수음악을 음악적인 기준에서 보는 것을 평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평이란 건 잣대를 두고 사회비판적 시각, 사회의 다른 문화와 예술 등을 비교하는 일이라 보고요. 칼럼니스트는 좀 더 폭넓게 개인주의적인 사상을 집어넣어서 한 섹션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 봅니다. 칼럼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극히 언론사적인 입장에서 자유롭게 하나의 주제에 대해 글을 쓴다는 코너에서 시작한 것이죠.

성용원 : 김종섭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니 확실히 구분되네요. 옛날엔 평론가들이 연주자들에게 이렇게 피아노 치면 안 된다. 연주도 아니다, 작곡가들에겐 작품도 아니다, 이건 쓰레기다. 이런 말들을 버젓이 하고 인쇄되어 출간도 되었었어요. 그래서 고소당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평론이 순화가 됐어요. 현재 활동하시는 분들과 그 이전 세대가 단절된 듯 보입니다.

김인겸 : 저도 제 윗세대 평론가분을 직접 뵌 적이 없고 다른 통로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사실은 이 시대에 활동하는 다른 평론가 분들과도 교류가 많이 없어요. 평론이라는 칼럼을 쓰는 일 자체가 굳이 함께 소통하고 할 일이 없습니다. 개인적인 작업이기 때문에요. 하지만 아쉬운 것은 미술 평론계를 보면 비평사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생각이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입장이 조금씩 나뉘긴 하지만요. 어쨌든 이렇게 정리가 잘 되어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제강점기, 심지어는 서양미술이 들어온 19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의 비평사를 한 권으로 충분히 조망할 수 있는데 지금 한국 음악 평론계는 이런 게 없는 거 같아요.

성용원 : 왜 그럼 우리 음악계는 미술 비평사 같은 것이 없냐는 거예요. 우리도 분명 음악 비평사 같은 게 있을 거예요. 이런 것들은 우리의 몫이잖아요.

송주호 : 영향력의 문제일 수도 있어요. 예전엔 리뷰, 비평도 신문에 실리고 많이 읽히고 갑론을박하면서 반론에 반론을 하면서 신문에 실리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단 말이죠. 하지만 요즘엔 평론이 사회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린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가치관에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어느 순간 바뀌면서 개인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심이 되다 보니까 평론 자체의 영향력이 감소되는 것도 있긴 하고요.

나의 음악, 나의 예술이란 개념이 강해지면서 평론이라는 그 자체가 영향력을 주지 못하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외국 같은 경우에는 연주자와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평론가들이 계속 대화하면서 새로운 장을 넓혀가는 모습을 실제로 봅니다. 그렇게 되어야 맞는 건데 우리나라에선 유독 글 쓰는 사람은 글만 쓰고 연주하는 사람은 연주만 하고 곡 쓰는 사람은 곡만 쓰는 등 상호교류가 되지 않아요. 그리고 나의 예술이라는 강한 프라이드가 있는데 이 때문에 대화가 잘 성립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김종섭 : 칼럼니스트들이 쓰는 글을 대충 보면 음악이 좋고 나쁘고를 평하는 글은 있지만 특정 연주인의 연주를 보고 평하는 글은 거의 없습니다.

송주호 : 어느 순간 강한 의견이 내재된 글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고, 있다고 해도 강한 논리가 뒷받침된 글은 많이 없게 되었습니다.

김인겸 : 매체의 문제인 것 같아요. 확실히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다 보니까 특히 만인비평의 시대가 도래했어요. 다들 가서 사진을 찍고 연주회에 대한 평을 한 마디씩 쓰고 그러다 보니까 굳이 전문 평론가 글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된 거죠.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의 클래식 음악 팬들은 주로 여성들이 많고 이 계층들이 클래식 음악을 아이돌 음악 대하듯이 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움직임이 있다 보니까 굳이 리뷰나 프리뷰나 인터뷰나 여러 가지 평론, 혹은 비평을 굳이 참고하거나 읽지 않게 되었고 과거의 올드 팬들은 자신들의 지각과 일종의 기호가 거의 고정이 되어있어서 팬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형태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일종의 단절현상이라고나 할까요?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음악학계에서의 연구 성과들과 어떤 평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이 유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소통이나 교류 없이 따로 논다고나 할까요.

성용원 : 김인겸 선생님의 말씀이 참 와 닿고 예리한 지적이라 봅니다. 왜냐면 복종의 시대는 이제 지났잖아요. 지금은 위키피디아 같이 만인이 같이 지식을 모을 수 있는 장소가 있고 블로그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올릴 수도 있고 공유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옛날 같은 지식의 절대적인 권위는 없어요, 옛날에는 배운 사람, 즉 몇 명만 알고 그러다 보니까 평론 독점의 시대가 있었지만요.

평론가의 길, 평론의 길

탁계석 : 그게 이제 무엇인지모르고 지금까지 온 거죠. 비평이 뭔지도 몰랐고 비평의 역할과 기능을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지성적, 인문학적, 또는 예술사적 토양이 없었던 거죠.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평론가를 한다는 것은 법적인 칭호가 아니니까요. 더구나 월급을 주는 직업도 아니다 보니까 자기들이 이름을 붙여서 비평가라고 우리 선배님들이 만들었죠.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게나 자유니까 맘대로 해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불문율 속에서 스스로 가치를 정립하고 만들어내는 등 왜곡될 수 있었지만 나름대로 길을 물으면서 왔죠. 비평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물으면서 왔던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제도권 밖에서 이루어지는 나름대로 가장 예술적인 행위로서 비평의 역사로 쭉 거쳐 온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이것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제도권에 들어가지 않는 건 분명한 거 같고 더구나 이것이 요즘말로 하면 직업화가 안 되는 즉 금전적으로 환산이 되지 않는 직종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외국의 경우에는 비평이라는 가치가 역사를 거치면서 뿌리를 내렸어요. 비평가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보면 비평가도 헛발질을 많이 해서 좋은 작품을 망가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역사가 정리를 해주었죠.

옛날에 평론가 중에서는 박용구, 유한철, 이성삼 선생님 등이 1대로 계셨죠. 이강숙, 김춘미, 현경채, 선생님도 그다음에 계셨죠. 저도 있었고요. 크게 나눠서 우리는 두 줄기로 봅니다. 하나는 현장을 중심으로 한 평론가가 있었고 또 한 축은 음반, 레코드를 중심으로 한 평론가들이죠. 예전에는 비평의 운동장이 있었어요. 쉽게 말하면 신문이죠. 옛날에는 신문이 비평의 운동장을 제공했고 그 다음은 잡지 객석이 있었고, 음악동아가 있었고요.

또 객석에서는 음악 평론상을 만들어서 이장직 기자가 1대 평론가 상을 받았죠. 지금은 그 상이 없어졌지만요. 그렇게 하다가 큰 줄기가 레코드를 리뷰하는 쪽으로 왔는데 80년대 90년대에는 그래도 매체라는 것이 비평을 수용해서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결정적으로 판이 바뀐 것은 소셜 미디어의 등장입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나 표현할 수 있죠.

언론이 비평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 장이 되었었는데 이 장이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거예요. 결정적으로 허물어진 것은 소셜 미디어의 등장이라는 거예요. 누구든지 리뷰를 할 수 있으니 굳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거예요. 예술 평론의 현장은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다 똑같이 일어났는데, 영화 같은 경우는 영화를 본 직후에 바로 리뷰가 올라와버리지 않습니까. 영화는 이미 독자들의 리뷰가 바로 상업성과 연관이 되어 있어요.

성용원 :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단절의 관점에서 다시 질문드려 볼게요. 우리 클래식 음악은 상업적이지 않잖아요. 가끔 신문에 올라오는 칼럼이라든가 일반인이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면 정말 가관인 것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주목을 끌고 절대적인 지식인 양 권위를 얻고 추앙을 받으면 이건 자업자득이 아닌가요? 평론가들이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린 거 아니냐는 거죠. 평론을 쓰라 그랬지 수필을 써놓고, 대중의 입맛을 따라잡기에 급급한 글을 써 놓고 차별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요?


송주호 : 다양할 거 같아요. 저도 많은 동호회에서 수용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해봤지만 굉장히 다양하죠.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이 글을 쓰고 소통을 하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말이 힘을 얻게 되다 보니까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점점 소통이라 하는 키워드 때문에 글을 쓰더라도 항상 사람들이 듣기 쉬운 말로 쓰다 보니까 아까 말씀하셨던 문제가 나타날 순 있죠.

성용원 : 조회수, 클릭수가 높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자극적인 말을 썼다 해서 그게 인기 평론가고 그 평론의 질과 객관성이 확보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평론만큼은 정말 공명정대해야 하지 않나요?

김인겸 : 단절되고 유리된 지금의 상황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겠습니다. 아까 탁선생님께서 평론의 운동장에 관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옛날에는 그런 게 많다가 지금은 많이 없어졌어요. 하지만 희한한 게 일부에게는 그 운동장이 많이 제공되는 걸 제가 목도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작년 8, 9월에 이루어진 백건우 선생님의 베토벤 전곡 소나타 연주에서 중앙일보가 연주가 끝나고 일본에서 평론가를 모셔서 글을 써서 그걸 번역까지 해서 참 친절하게도 중앙일보 지면에 내주었죠. 저는 그것을 보고 상당히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의 평론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중앙일보 같은 메이저 신문사에서 이럴 수 있습니까?

그 일본 평론가분이 백건우 선생님의 팬이고 조예가 깊다는 걸 부정하진 않지만 그렇다 해도 한 지면을 그런 식으로 할애를 해 주었다는 점에 굉장히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또 선우예권이나 조성진, 김봄소리 같은 스타 연주자들이 리사이틀을 하고 협연을 하면 너도나도 와서 리뷰룰 쓰고 그 다음 날 네이버에 들어가면 리뷰들이 쫙 뜹니다. 그런데 그런 연주자들 말고 탄탄한 실력을 갖춘 바로 그 밑 연주자들은 제가 볼 때 큰 관심을 받지 못해요.

탁계석 : 그게 아전인수 격이죠. 힘을 가진 자. 운동장을 가진 사람이 그 운동장을 평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게 아닌 나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내어주는 거죠. 옛날엔 조선일보가 주최하면 조선일보가 하는 공연만을 위해서 리뷰를 부었습니다. 그러면 을의 입장에서 조선일보가 주최했기 때문에 그걸 깎아내릴 수 없는 거예요.

지금은 신문사 사업부가 공연을 안 해요. 예전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공연을 다 했잖아요. 그럼 그때만 평론가를 찾아요. 그러다 보니 평론이란 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정말 언론이 사회와 문화예술을 위해 평론을 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평론가를 쓰고 버렸어요. 그나마 남아있는 평론가는 전문 매체인 잡지 쪽으로 들어가게 되고요. 운동장은 있는데 우리의 운동장이 아니고 그들의 운동장이 되어버렸어요.

김종섭 : 비평과 평론의 영역이 운동장이 좁아진다 하더라도 사라질 순 없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기회를 이용해서 비평과 평론이 앞으로 방향과 역할, 영역 확장에 대한 방법 등에 긍정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성용원 : 어떻게 보면 SNS가 더 잘 된 것일 수도 있겠네요? 운동장에서 운동을 못하게 된 사람들이 스스로 운동장 만들어 글을 올릴 수 있는 플랫폼이 마련된거 잖아요.

탁계석 : 성 작곡가님이 말씀하신 대로 운동장이 옛날에는 우리 동네 운동장이었다면 소셜로 가면 세계의 운동장이지요. 전 세계가 다 보는 겁니다. 아프리카 북극에서도 다 보는 거예요. 제대로 된 글을 제 블로그에 게재하니 하루에 2000명씩 들어왔어요. 일주일이면 거의 만 명 가까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이건 전 세계가 다 보는 거예요. 비평은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슈퍼 운동장을 가지게 된 거예요.

성용원 : 언론도 그렇지 않습니까? 뉴스 같은 경우도 제가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걸 보도 하는 게 아니라 기자가 기사거리가 될 만한 것을 선정해서 제공하고 우리가 보는 거잖아요. 하지만 SNS는 그렇지 않고 내가 기자가 될 수도 있고 실시간으로 뉴스를 선택할 수 있는 건데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이런 위기도 있지만 한편으론 긍정적 효과도 있을 것이라 봅니다.

송주호 음악칼럼니스트


송주호 : 당연히 그렇죠. 파워블로거 중에는 예술계에서 많은 글을 썼던 분들도 있고요. 또 다른 영향력을 가진 분들이 책과 같은 다른 매체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이 있죠. 그리고 팟캐스트 같은 새로운 미디어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굉장히 많은 가능성이 열려졌고 이미 많은 분들이 활동하고 있죠.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가 처음 했던 이게 과연 제대로 할 일인가지에 대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의 리뷰에 대해서 크리에이터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충분한 논리가 있는 사람들이 글을 쓰는 게 원칙적으로는 옳다고 봐요. 수용자들도 여러 가지 글을 보았을 때 스스로 판단해 낼 수 있는 능력은 있어야지요.

김인겸 : 스스로 연주할 수 없는 사람이 타인의 연주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전 금과옥조 같이 여기고 있어요. 이는 저만의 어떤 독특한 지점으로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연주활동을 합니다. 또 어떤 음악을 비평하고 평론을 할 때도 집에서 연주해 봐요. 제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요.

김종섭 : 글을 쓰기 위해 악기를 잘하면 좋겠지만 연주를 잘한다 해도 연주자가 무대에서 하는 만큼의 실력과 마음가짐까지는 우리가 읽어낼 수 없잖아요. 연주자가 받아들이는 만큼의 깊이 있는 글을 쓰시려고 노력하신다는 거죠.

평론가의 자격과 조건

김종섭 : 인터넷을 통해 평론의 운동장을 더 확장시킬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비평가 입장에서는 운동장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요. 이미 스타주의에 빠져 있는데 그 상태에서 쓴소리를 해봤자 영향이 없다는 거죠. 오히려 그런 곳에는 파워블로거 같은 사람들이 얄팍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수식어를 동원해서 글을 쓰면 모두가 달려들어 관심을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운동장을 넓힐 수는 있겠죠. 하지만 진정한 비평가의 입장에서 비평을 쓰면 운동장을 넓히는 게 아니라 좁혀질 수 있어요.

성용원 : 음악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십 수 년 공부해 학위를 취득하고 전문가로 인정받는 반면 평론가는 기준, 자격, 공부 등이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평론가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요. 파워블로거라고 좋은 평론가가 아니고 잘 팔리는 책이라고 좋은 책이 아닌 것 처럼요. 종종 피아니스트나 성악가인 분들이 갑자기 평을 쓰는 것을 보게 되는데 대체 평론가의 기준은 뭡니까?

탁계석 음악펑론가

탁계석 :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듯 평론가라는 것은 법에서 인정한 사람도 아니고 제도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이름도 아닙니다. 비평이 사회로부터 연주가로부터 관객으로부터 설득을 받으려면 문장이 있어야 되겠고 두 번째로 디테일한 전문성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국립 오페라 단장이 나왔는데 소비자인 국민들은 그거에 대해 말할 환경이 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우엔 커피 마시고 맥주 마시면서 떠듭니다. 감독이 어떤지에 대해서요.

하지만 우리는 관심이 없어요. 이 점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정치가도 아니고 경제인도 아니고 대학도 아니고 성악가들은 누가 있습니까? 자신에게 직접 관계가 되니 불이익을 당할까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엔 비평이 여기에 대해 논란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하지 않아요. 신문사들도 쓰지 않습니다. 그럼 이것이 블랙홀처럼 아무 기능이 없는 거예요. 이럴 때 비평이 역할을 해주면 그로써 또 한 축이 만들어지겠죠.

성용원 : 그럼 원로 비평가로서 왜 후배 비평가들이나 동료 비평가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탁계석 :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 일을 35년간 해왔습니다.

성용원 : 그럼 지극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평론가가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시험이라도 보는 건가요? 적어도 음악인은 음악대학에 가기 위해 입학시험이라도 보잖아요. 어떤 잡지들을 읽다보면 이 사람은 분명 2년전 까지만 해도 피아노를 쳤는데 왜 지금은 글을 쓰고 있나하는 궁금증이 드는 경우가 많아요.

김인겸 : 평론이라는 작업은 생각보다 통찰력과 인문학적인 여러 가지 다양한 학문에 대한 소양이 중요한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제도적 교육으로 재단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해요. 예컨대 조선 중종 때 조광조가 현량과라는 일종의 추천제를 제안했고 역대 한국이나 중국에서 보면 천거라는 제도가 과거제도와 함께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선배 평론가가 평론을 하고 싶어 하는 신예들을 뽑아서 하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사실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뽑혀서 명예기자로 작업을 하다가 평론의 길로 들어선 거거든요. 편집자들이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일을 해주어야 합니다. 평론가들끼리도 서로 함께 평론에 대한 생각과 잣대와 기준에 대해 토론까진 아니더라도 담론정도는 만들어서 우리가 평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최종적으론 개인이 작업을 해야 하겠지만요.

김종섭 : 슈만이 브람스에 대해 글을 썼던 일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싶네요. 슈만이 음악신보를 낼 때 그의 직업이 평론가라 하지 않아도 슈만이 글을 쓰면서부터 이미 평론가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국가가 슈만에게 평론을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국가가 평론가란 직업을 준 것도 아니고 평론이란 것 자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그래서 평론가란 직업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인문학적인, 철학적인, 사학적인 기틀을 가지고 해야 하는 건데 누가 무슨 잣대를 가지고 평가를 하냐는 것이 문제이죠.

글을 써서 만인이 독자가 되어 그 글을 읽고 비웃을 수 있고 칭찬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 만약 제가 편집장의 입장에서 글을 냈어요.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닌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평가를 해요. 1차적으론 소비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글을 걸러내면서 점차적으로 좋은 사람이 살아남고 그 평론가가 이어나가면서 좋은 글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탁계석 : 확실히 대중적인 확산성 브랜드 이미지도 필요합니다. 연주자의 연주력이 대가와 거의 비등해도 다른 사람은 다 죽고 하나만 뜨거든요. 글은 좋은데 안 읽어요. 그런 부분을 우리가 어떻게 잘 대처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아야 합니다.

김인겸 : 현재 메이저 잡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 칼럼니스트를 보자면 그분들이 대부분 글 자체보다는 글이라는 것을 자신이 음악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방편으로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강연에 더 집중을 한다 생각합니다. 물론 그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되다 보니까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이 있는 거죠. 글과 강연이 같이 가면 좋겠는데.

탁계석 : 평론에 여러 가지 기능이 있어서 그걸로 평론도 할 수 있고 강론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말한 대로 본질은 하나도 하지 않고 평론의 이름만 빌려서 해설에만 치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김종섭 : 맞습니다.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글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입으로 말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예전엔 글만 가지고 평론을 했다 지금은 매체도 많이 변했지 않습니까. 방송에 나와서 입으로 하는 평도 괜찮아요.

 


탁계석 : 모두 가능하지만 본질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죠. 방향을 드리자면 평론가가 최소한 먹고 살 수 있게는 해야 해요. 그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 번째로 전국의 시립 합창단, 오케스트라 등 모든 단체의 평가 기능이 있어요. 그걸 가져와야합니다. 합창단을 뽑잖아요? 그러면 평론가도 들어가야 하는데 평론가는 뽑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자기들끼리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 다음에는 상을 주는 일도 있습니다. 이쪽도 우리가 해야 합니다. 평론가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선곡과 선택 기능입니다. 올해 이 달의 좋은 음악가와 작품을 평론가의 이름으로 올리면 당연히 힘을 갖는 거예요. 좋은 것을 선정해서 평론가의 이름으로 올려놓는 겁니다. 그리고 이 달의 베스트 연주가를 우리가 찾는 거예요. 그 때는 평론가가 힘을 쓰게 되어있어요. 평론가의 권위가 자연스레 올라가는 거예요.

성용원 : 그런 역할을 하라고 비평가협회, 평론가협회가 있는 것인데 왜 구심점이 없고 흐지부지 한거죠?

탁계석 : 협회와 조직들이 지금은 사무실도 없고 행정이 받쳐주지 못하다 보니까 현시대 흐름을 쫓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월간 뮤직리뷰도 유력한 단체와 연관을 맺어서 평론가를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축제가 있다 하면 당연히 평론가가 가야 합니다. 돈은 몇 억씩 들여서 공연이 올라가는데 평론가들은 근처에도 가있지 않아요. 저희들끼리 알아서 심사위원을 내고 평론가는 빼버리는 겁니다. 평론가가 배제되는 거죠. 매체가 나서서 좋은 단체를 뽑아주고 평론가들도 좋은 단체를 뽑아주면서요.

성용원 : 그러니까 그걸 월간뮤직리뷰가 하는 게 아니라 월간뮤직리뷰라는 운동장이 있으니까 비평가와 협력하라는 말씀이시죠. 어떻게 보면 희망적이네요. 월간 뮤직리뷰라는 운동장도 있고 김종섭 편집장이라는 구심점도 있는 것이니까요.

김인겸 : 선배 평론가님과 함께 있으니 좋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소통의 필요성도 느꼈습니다. 물론 먹고사는데 있어서 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한 생계유지비가 현실화가 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는데 문제는 고용주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부작용이 생겨버려요. 그런 부작용을 어떻게 해소할거냐 하는 방안도 아울러 강구하면서 함께 추진해 나가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송주호 : 지금까지 평론가끼리의 교류와 만남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론이 의미가 있으려면 평론하고자 하는 대상에 영향을 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전혀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는 영향을 줄 수 없으니까요. 서로 상대방의 책을 읽지 않고 나는 나대로 말하고 상대방은 상대방 식의 일방적인 발언만 나오면 불안하거든요. 그런 예술가와 평론가 그리고 관객이 만날 수 있는 장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시대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장을 통해 모임의 장이 만들어져야 평론이 좀 더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질 겁니다.

김종섭 : 글을 통한 평론이 아니라 말을 통해 할 수 있는 평론을 영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장을 자주 마련하면 참 좋을 듯싶습니다. 예를 들어 사라장이 연주를 하면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연주를 두고 몇몇 연주자를 대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아무튼 오늘 이런 만남의 장을 마련해주신 성용원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이번 썰전을 마칩니다.

글 김종섭 정리 김현지 사진 조기웅

 

임규태 기자 cenews1@daum.net/웰빙코리아뉴스(www.wbkn.tv)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wbkntv12@daum.net @웰빙코리아뉴스
<Copyrights © 웰빙코리아뉴스 & wbkn.tv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임규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핫클릭뉴스
icon포커스뉴스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공연/전시 포스터
  • 1
  • 2
  • 3
  • 4
  • 5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최근 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대전 본사 사옥) 대전광역시 중구 중교로 76(대흥동)  |   (경기지사)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어정로 80, 102-1903
    등록번호 : 대전 아 00270  |  등록연월일: 2011년3월 4일  |  발행·편집인 : 임규태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임규태
    대표전화 : 1899-4795  |  Copyright © 2011-2018 웰빙코리아뉴스.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llbeingkoreatv@nate.com  |  Editor in Chief : LIM KYUTAE
    Back to Top